몇 시간째 방안에 홀로 우울한 생각만 하고 있으니, 머리가 아파 밖으로 잠시 나왔다.
11월임에도 불구하고 날이 몹시 추워 입김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잠시 후회했지만 매몰 비용을 생각해 미호강 일대까지 걸음을 옮겼다.
"응? 저 사람, 은경이잖아?"
미호강 강변에 이르렀을 때 은경이 강 풀숲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마음이 착잡했지만 세종시의 유일한 친구를 만나니 반가움이 들었다.
"은경, 이른 아침부터 뭐 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마리안."
이 말 이후, 은경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저기? 아, 죄송해요! 좋은 아침이에요. 은경."
그게 정답이란 듯이 은경은 동그란 눈을 더욱 조금 가늘이었다.
"네. 마리안. 인사는 매일 반복하니까 그 중요성을 잊지만, 친구 사이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필수 요소예요."
모든 예술가가 이런지 유독 은경만 특별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은경과의 대화는 항상 몽환적이고 설레는 기분이었다.
"대답 늦게 해서 미안해요. 뭐 하고 있냐고 물어보셨죠? 들풀 냄새를 담고 있었어요. 11월은 가을의 초절정이라 차가운 들풀 냄새가 특히 좋거든요. 한정판이에요."
"들풀 냄새요?"
"네. 이 유리병에."
은경은 그렇게 말하고 빈 유리병, 아니 들풀 냄새가 담긴 유리병을 보여줬다.
"…거기에 담겨요. 들풀 냄새?"
"단순한 냄새를 넘어 감각의 층이 담긴다고 할 수 있죠. 그보다 안 그래도 마침 마리안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바닥에 놓인 에코백을 힘겹게 들어 내게 건넸다.
"이건 뭐에… 아, 무거워!"
얼떨결에 건네받은 에코백 안에 유리병이 무더기로 있었다.
"이 병은 9월 코스모스 꽃향기에요. 이건 시든 억새풀 냄새구요. 의외로 억새는 시든 게 향이 더 좋거든요. 아, 이건 은행나무 냄새에요. 요즘은 암나무만 심어서 냄새가 안 나는데 제가 힘들게 다른 지역까지 가서 수나무 냄새로 구해왔어요. 근데 여기서 열진 마세요."
신난 은경은 유리병을 양손에 들고 하나하나 재잘거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고마워요. 너무 많이는 무거워서 못 들고 가니까 몇 개는 빼고 가져갈게요."
'은행나무(※중요: 수나무임)' 라벨이 붙은 유리병 하나를 은경 손에 고이 돌려주고 나는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그런데 갑자기 웬 선물이에요?"
"마리안 최근에 힘든 일 있었잖아요. 저도 비슷한 일 겪어봐서 마리안의 심정 잘 알아요."
"그래서…."
"저는 소심하고 둔해서 마리안에게 큰 힘은 못 되어주지만 이런 사소한 거라도 위안을 주고 싶었어요."
세종시에 온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상인으로서 자리를 잡기는 아직 짧은 시간이란 것을 알지만, 마음을 나눈 친구 한 명 없다는 점은 조금 힘들었다.
그런 내게 은경과의 만남은 보물 같은 소중한 인연이고 나는 그 사실을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느꼈다.
은경은 나보다 어린 나이임에도 생각이 무척이나 깊고 작은 행동 하나 짧은 대화 하나 신중하고 아름답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녀 또한 철인은 아닌지라 분명 고뇌하고 아파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늠름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나 역시 그런 그녀 곁에 계속 친구로 남으려면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고마워요. 다시 한번. 진심으로 고마워요. 덕분에 제가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문뜩 고향에서의 마지막 밤이 생각났다.
그런 일이 있어도 여전히 나약했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은경과 나란히 서기 위해서.
나는 싸움을 선택했다.
(스토리텔러: 김남훈)

본 저작물의 모든 권리는 김남훈에게 있습니다. (ⓒ 김남훈,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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